해미천 좌우 주변에서 1866년부터 1872년 사이에 1천명 이상의 신자들이 생매장 당하였다.
이 순교자들의 유해는 대부분 홍수로 유실되고, 1935년 그 일부를 발굴하였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교우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보존되다가 2009년 1월에 여숫골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돼 있었는데 최근 1995년 순교자대축일에 원래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 순교탑 앞으로 이장됐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 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 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